신대륙 발견 이후 ‘부’의 원천, ‘토지’에서 ‘투자’로

신대륙 발견 이후 ‘부’의 원천, ‘토지’에서 ‘투자’로

신대륙 발견 이후 ‘부’의 원천, ‘토지’에서 ‘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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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3대 사건, 신대륙 발견·종교개혁·군사 혁신● 유럽과 오스만 ‘관세전쟁’, ‘향신료’에서 비롯● 바스쿠 다가마, 인도양 무역으로 투자금 60배 수익● ‘은’으로 전 세계 하나 된 글로벌 교역망 출현 새로운 항로 개척에 불을 붙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Gettyimage 중세와 근대의 중간 시대를 근세(近世·early modern period)라고 한다. 근세는 일반적으로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중반까지로 본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부터 근세가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파산
중요한 것은 근세가 언제 시작됐느냐가 아니라 '근세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근세 대변혁 이끈 '돈'의 힘중세는 이슬람의 시대였다. '무력'에서건 '무역'에서건 유럽은 이슬람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런 약체 유럽이 18세기 중반 근대가 시작될 즈음 세상의 중심이 됐다. 과연 근세에 무슨 일남자직장인
이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근세 초기인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반세기 동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신대륙의 발견, 군사 혁신, 종교개혁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항해술의 발달, 화약 무기 개발, 인쇄술의 발전 등 기술혁신이 이를 뒷받침했다. 반세기 동안 일어난 다한국기술
양한 사건이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상을 바꿔나갔다. 이러한 변혁이 끝날 즈음에는 세계의 중심이 동방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근세의 대변혁 뒤에는 '돈'이 자리하고 있다. 돈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욕망은 콜럼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미지의웰컴론 단박대출 조건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했고, 괴츠 폰 메를리힝겐 같은 남부 독일의 군사기업가를 참혹한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인쇄술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상업투자자들의 대규모 투자가 그들의 열망을 뒷받침했다. 그들은 기꺼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대항해와 화약 전쟁, 인쇄기에 투자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가 어떻게 가능했을까.근로기준법 식대
결론부터 얘기하면 유럽에 이미 신용과 금융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던 금융이 대항해, 인쇄기, 무기 혁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과감한 투자를 가능케 했다. 그 배후에는 도전과 혁신을 마다하지 않는 상인(기업가)이 있었다. 상인 정신은 중세 말부터 유럽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거기에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역할이 컸다. 세계 교역을스마트저축은행 추가대출
선도하던 이슬람 상인과 거래하면서 배운 것을 유럽에 적용했고, 더욱 발전시켜 결국 그들을 따라잡았다. 15세기 대표적 상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들은 교황과 유럽 왕들의 돈줄이었고, 르네상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15세기 말 메디치 은행이 문을 닫자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푸거가(家)는 채무통합대출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와 그의 아들인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전쟁 자금을 지원하면서 최고의 금융가로 명성을 떨쳤다. 푸거가가 없었다면 스페인의 아르마다 무적함대도, 테르시오와 같은 혁신적 군대 편제도 없었을 것이다.  푸거 가문이 몰락하고 나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무역과 금융을 전담하신한캐피탈전세보증금
다시피 한 세력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제노바의 은행가와 상인들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테르시오의 명(名)지휘관이었던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에스파냐 해군의 지휘관 안드레아 도리아 모두 제노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면, 에스파냐와 제노바 간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했는지 알 수 있다. 일찍부터 금융업 융성한 '제노바국민주택기금전세
'제노바는 배후의 리구리아산맥 때문에 지리상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노바의 주요 사업은 무역, 전쟁 그리고 금융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진정한 의미는 지중해 경제를 대서양은 물론 북해와 연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제노바에서는 일찍부터 금융업이 융성했다. 13세기 금화 '제노비노'를 찍어내고 예금과 환어음을 다루는 현대적 금융기법을 개발했다소상공인교육센터
. 14세기 말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쇠락하는 듯했으나 에스파냐의 부상과 함께 다시 부흥했다.  제노바가 처음 이베리아반도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상인들이 영국과 플랑드르로 항해하던 도중에 바르셀로나, 세비아, 그리고 리스본에 기착하면서부터다. 이후 상인들은 이들 도시에 상업발전의 가능성을 일깨웠고, 일부는 세비야와 리스본에 정착해 직접 무역업과 금융업을 영위했다. 제노바가 에스파냐 왕실의 은행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신대륙에서 들어온 은(銀) 때문이었다. 16세기 이후 신대륙으로부터 대규모의 은이 에스파냐로 들어왔지만, 네덜란드와 계속되는 전쟁으로 에스파냐 왕실이 파산을 선언했고, 그들의 돈줄이던 푸거 가문도 파산한다. 이때 푸거 가문을 대신해 제노바 은행가들이 에스파냐 왕실의 금융 업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대항해를 시작한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 Gettyimage 근세 상인들이 국가의 주도 세력이 돼 드러내놓고 돈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 말 이후 돈에 대한 관점과 통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인간의 본성인 돈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이자도 금지했다. 하지만 면벌부를 발행하는 등 앞뒤가 안 맞는 행동으로 대중의 신망을 잃었다. 돈을 멀리하고 빈한(貧寒)을 덕이라 말하는 가톨릭의 세상은 저물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필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이 사회적 선(善)이 되는 세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개신교는 이런 변화에 신앙적 근거를 제공했다. 공공연하게 돈을 추앙하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전혀 흠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됐다. 근세의 대변혁은 이런 정신적 대변화 속에서 일어났다. 근세 초기 신대륙의 발견 이후 유럽 중심의 세계는 지구 전체로 크게 확장됐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카디스 근처 작은 항구에서 출항해 신대륙을 발견한 지 한 세대 만에 아즈텍과 잉카제국이 몰락했고, 신대륙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귀금속은 오랜 기간 중세의 병폐였던 화폐 부족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상업자본주의 태동은 여기서 출발했다.  또한 교회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인쇄술을 만나면서 기존 세상의 관념의 틀을 통째로 바꿨다. 가톨릭 세계에 맞서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유럽의 변두리까지 전파되면서 가톨릭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신의 세상은 종말을 고했다. 교회의 분열은 유럽 사회를 분열시켜 80년 종교전쟁을 일으켰다. 종교전쟁 이후 유럽 사회는 이전의 세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물리력을 제공한 무기와 군사의 혁신이 있었다. 15세기 이후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와 총기가 전쟁을 지배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1494년 이탈리아 전쟁 이후 끊임없는 전쟁과 전투 속에서 서유럽의 무기와 군대는 점점 강해졌다. 한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침략자들에게 무참히 당했던 유럽인들은 이러한 군사력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동양과 신세계를 향해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15세기 유럽 최고 사치품, 향신료근세의 대표적 사건인 '신대륙의 발견'에 관해 살펴보자. 서유럽의 대항해와 이로 인한 가격혁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유럽인들의 목숨을 건 대항해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왜 이런 행운이 에스파냐에 일어났을까. 지금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로 하겠다.  흑사병이 사라진 뒤 서유럽의 생활수준은 빠르게 개선된다. 인구는 3분의 1 이상 줄었는데 기술은 향상해 농업생산량은 크게 줄지 않았고, 1인당 소득수준은 흑사병 창궐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소득이 늘면서 전체 소비에서 사치성 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했다. 15세기 유럽에서 최고의 사치품은 후추 같은 향신료였다. 수요가 늘어나니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향신료는 대부분이 수입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과 은이 계속 해외로 유출됐다. 국내에 돈이 없어지면 경제 전반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게 된다. 금속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대신 농산물과 같은 소비재의 가격은 하락하게 된 것이다. 1400년부터 100년 사이 서유럽 소비재의 가격은 20~50%까지 내려갔다. 디플레이션이 계속되고 금과 은의 가격이 오르니 시장에서 금과 은은 자취를 감췄고, 이는 화폐경제의 기반을 위협했다. 대체 향신료가 뭐길래 유럽인들은 이렇게 열광했을까.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고기를 소금에 절여놓았는데 그러면 고기 맛이 떨어졌다. 그래서 후추 등 동방의 향신료를 가미해 먹는 것이 상류층에게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다. 요리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향신료는 유럽의 상류층에게 필수 식자재였다. 대표적 향신료로는 인도의 후추, 말루쿠제도의 정향(丁香), 반다 제도의 육두구(nutmeg)를 들 수 있다.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귀하게 여겨진 상품이다. 말루쿠제도의 정향도 귀한 향신료였다. 키 큰 나무에서 꽃이 피기 바로 직전에 꽃봉오리를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리는데, 말린 꽃봉오리가 못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이라 불렸다.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부패 방지와 살균력이 뛰어나 햄, 소스, 수프 등 서양 요리에 필수인 향신료다. 육두구는 지금은 캔 음료의 맛을 내는 첨가제로 사용하거나 그 껍질로 잼, 젤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고기의 누린내나 비린내를 제거하는 데 많이 사용했다. 근세에 네덜란드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면서 유럽 시장에서 매우 비싸게 거래됐다. 당시 아시아의 물품을 유럽에 들여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스만제국을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은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 적대 관계였다. 오스만제국은 수입과 수출에 각각 관세를 부과했는데, 동양의 상품은 오스만제국에 일단 수입됐다가 다시 수출되기 때문에 두 배의 관세가 부과됐다. 향신료 같은 사치품에는 훨씬 더 높은 관세가 매겨졌다. 그래서 향신료 1g이 은 1g, 심지어 금 1g과 맞먹을 정도의 비싼 값에 유럽에 수입됐다. 이러한 오스만제국의 횡포 때문에 유럽은 새로운 교역로를 찾아야 했다. 향신료를 둘러싼 유럽과 오스만 간의 갈등은 유사 이래 손에 꼽히는 관세전쟁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보다 동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후추를 물 쓰듯 한다"라고 쓰여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새로운 항로 개척에 불을 붙였다. 대항해시대는 이러한 시대 배경 속에서 출현했다. 향신료와 귀금속, 즉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목숨을 건 대항해를 시도하게 했다. 국토회복 전쟁(레콩키스타)으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지리적으로 대서양과 접해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대항해가 처음 시작됐다. 이베리아반도의 지리 조건과 이슬람과의 성전에서 승리한 자신감, 거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의 돈에 대한 동물적 감각과 기업가정신이 더해지면서 분출된 엄청난 에너지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뜻밖의 역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대항해'는 오늘날 벤처투자당시에 서쪽 바다를 향해 계속 항해한다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 번도 가지 않은 미지의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러나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로 계속 나아가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자금을 후원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장거리 항해에 필요한 선박, 선원들의 급료, 갑판에 설치된 대포 등 모든 것에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그의 꿈에 거금을 투자할 사람은 없었다. 이때 나선 사람이 에스파냐의 통치자 이사벨라 여왕이었다. 콜럼버스의 끈질긴 설득에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꿈을 믿어보기로 한다.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 결정과 함께 프란체스코 피넬리 등 세비야 지역의 제노바 금융업자(상인투자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등 귀족들, 팔로스의 투자자들이 사업에 뛰어들면서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현실이 됐다.  콜럼버스 대항해를 후원한 에스파냐 통치자 이사벨라 여왕. Gettyimage 금융업자와 귀족의 컨소시엄은 이미 국토회복 전쟁, 카나리아제도 정복 때부터 유사한 형태의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투자하기로 결정만 되면 돈을 모으는 것은 큰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성행하던 면죄부(면벌부) 판매 수입도 왕실과 금융업자를 통해 이 사업에 들어갔다. 왕실은 투자도 투자지만 이들에게 사업 독점권을 주면서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투자 카르텔'을 형성한 이들은 오늘날 '벤처투자자'라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이 모두 모여 콜럼버스의 무모한 항해가 가능했다.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팔로스(Palos)라는 작은 항구에서 출항했다. 1492년 10월,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오늘날의 카리브해 어딘가에 상륙했고, 3개월 동안 신대륙의 해안을 탐험했다. 그들은 그곳이 인도의 해안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이라 불렀다.  그들의 추정은 완전히 잘못됐지만 이 항해는 세계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다. 1513년 탐험가인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발견한 덕분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아즈텍 제국을 발견했고, 이어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발견했다. 거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그들은 마구잡이로 약탈했고,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을 완전히 파괴했다. 1532년 피사로는 잉카제국에 쳐들어가서 단 168명의 군사로 8만 명의 잉카 군대를 상대해 승리를 거뒀다. 에스파냐 군대에는 무기의 혁신으로 탄생한 화약 무기가 있었고, 이는 신대륙의 무기를 완전히 압도했다. 유럽인들이 전파한 전염병도 제국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 얼마 뒤 에스파냐의 탐험가 마젤란이 후일 그의 이름을 딴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의 마젤란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나왔고,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에 도착한다. 마젤란은 현지의 부족장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 부하들은 에스파냐에 귀환했다. 마젤란 일행의 귀환으로 이 지역의 존재가 알려졌고, 에스파냐는 해군을 보내 섬을 정복했다. 이 섬은 황태자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명명됐다. 펠리페 황태자는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왕에 올랐고, 1571년 마닐라를 건설해 태평양의 거점으로 삼았다. 에스파냐는 이렇게 아메리카와 태평양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다. ‘진짜 인도' 찾은 포르투갈인들에스파냐보다 더 일찍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항해 왕자'라 불렸던 엔히크 왕자는 '죽음의 곶'이라 불리던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을 개척해 금과 노예를 얻었고, 이후 주앙 2세도 아프리카에서 엄청난 금을 확보한다. 주앙 2세 사망 후 왕이 된 마누엘 1세는 묵시론적 메시아 사상에 빠져 전설로 전해지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을 찾기 위해 1497년 리스본에서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의 선단을 출항시켰다. 이 원정은 피렌체 상인들이 자금을 댔고, 네 척의 배와 17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됐다. 규모는 작았지만 모두 항해와 무역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1498년 콜럼버스가 세 번째 항해에 나섰을 때 바스쿠 다가마는 희망봉을 넘어 인도 서해안에 있는 향신료의 도시 캘리컷에 도착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라 생각하며 탐사하고 있을 때, 포르투갈인들은 '진짜 인도'를 찾은 것이다.  1498년 희망봉을 넘어 인도 서해안에 있는 향신료의 도시 캘리컷에 도착한 바스쿠 다가마. Gettyimage 당시 인도는 유럽보다 훨씬 풍요로운 국가였다. 후추 재배 산업 이외에도 갖가지 수공업이 발전해 있었다. 캘리컷의 고급스러운 무명 옷감에 유럽인들이 열광했고, 이 직물에 '캘리코'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 캘리코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면직물 산업에서 시작된 것이다. 1499년 다가마와 그 선원들이 2년 만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출항한 170명 가운데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했지만, 유럽인들은 인도에서 온 상품에 환호했다. 이 항해는 단기적으로 콜럼버스 원정보다 훨씬 큰 수익을 낳았다. 이슬람 상인이나 이탈리아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인도로 바로 가는 직항로가 열린 것이다. 서유럽의 동양 진출 시대가 개막됐다. 유럽인들은 후추, 정향, 계피, 생강, 금, 진주, 비단 등 인도양을 건너온 상품에 열광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상품은 양모 직물, 설탕, 버터, 벌꿀 등으로 변변치 못했다. 하지만 다가마는 항해의 수지타산을 맞출 만큼 충분한 향신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항해는 투자금의 60배에 달하는 수익을 낳았다. 다가마가 돌아온 지 불과 6개월 뒤에 출발한 2차 원정대는 13척의 선박과 1500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됐다. 투자자들이 더 붙은 것이다. 이들 역시 1501년 후추와 정향을 비롯한 향신료를 가득 싣고 귀환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실은 해마다 규모가 확대되는 선단을 파견했고, 상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댔다.  결혼과 상업적 유대를 통해 귀족들과 상인 투자자들은 리스본에서 하나가 됐다. 과거 토지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던 귀족들의 부가 16세기 들어 항해에 대한 투자 자본으로 전환됐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업자였던 푸거 가문도 항해에 투자했으며, 비슷한 시기 독일의 상인 투자자 컨소시엄도 구성됐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금과 노예, 아시아의 향신료를 수송하는 장거리 무역을 서유럽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을 뿐 아니라, 동서양 작물의 이식에도 성공했다. 동양에서 브라질로 사탕수수를 이식해 경작에 성공했고, 홍해 입구에 있는 예멘의 항구도시 모카의 커피도 포르투갈을 통해 인도네시아 자바섬과 브라질로 이식됐다. 초콜릿 향이 나는 모카의 커피는 이렇게 유명해졌다. 이후 다른 커피에도 인위적으로 초콜릿 향을 첨가해 오늘날의 모카 커피를 탄생시켰다. 1521년 에스파냐의 마젤란이 필리핀제도에 도착하면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간 경쟁이 격화됐다. Gettyimage 그러나 포르투갈의 동인도 항로 독점은 오래가지 않았다. 1521년 에스파냐의 마젤란이 필리핀제도에 도착하면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간의 경쟁이 본격화했다. 곳곳에 두 나라의 중개 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에스파냐와의 합병이었다. 에스파냐와의 합병은 동인도 교역에 특화된 포르투갈의 강점을 약화시켰다. 합병으로 리스본과의 교역이 끊긴 네덜란드가 독자 항로를 개발하고 포르투갈의 무역권을 빼앗았다. 에스파냐도 포르투갈과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참패한 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동인도 항로에 뛰어들면서 해상권을 점차 이들에게 내줬다. 신대륙 발견이 촉발한 '16세기 가격혁명'신대륙의 발견은 유럽 대륙 전체에 충분한 화폐를 공급하면서 이른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켰다. 신대륙 발견 이전 수백 년 동안 유럽은 화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폐가 없으니 거래와 무역이 위축됐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환어음 등 대체화폐가 출현했다. 그러나 금속화폐의 부족을 메우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서서히 디플레이션(deflation)이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16세기 신대륙으로부터 금과 은이 대량 유입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를 '16세기의 가격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고 할 만큼 물가가 폭등했지만 상인들의 교역 활동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금·은의 에스파냐 유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미 이야기했듯이 파나마 지협 발견 이후 에스파냐인들은 잉카와 마야제국에서 금과 은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이것이 고갈될 무렵인 1545년 포토시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은광이 발견됐고, 1년 후 멕시코 사카테카스에서 은광이 또 발견됐다. 여기에다 이탈리아의 기술자 바노초 비링구초가 수은을 이용한 금속 추출 공법을 개발하면서 은을 대규모로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에스파냐의 은은 유럽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은은 그 자체가 화폐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은의 유입은 그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우선 은의 유입이 펠리페 2세의 눈을 흐리게 해 자신의 몰락을 재촉한 네덜란드와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에스파냐는 플랑드르에서 싸우는 용병들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은을 지급해야 했다. 은은 에스파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플랑드르, 발트해, 동아시아, 레반트 등지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많은 은이 유입됐음에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은은 계속 부족했고, 결국 에스파냐는 16세기 후반부터 거의 100년 동안 여섯 차례나 파산을 선언했다. 그러는 사이 푸거 가문은 도산했고, 17세기 중반 종교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에스파냐를 지원하던 많은 제노바 은행이 파산했다.  ‘은'을 에스파냐 몰락의 원인으로 꼽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보통의 경우 자원의 발견이 경제를 풍요롭게 해주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는 경제를 망칠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고 한다. 천연자원에 의존해 급성장한 국가가 통화가치 급등, 물가 인상, 급격한 임금 상승으로 인해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고 경제가 침체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른바 '자원의 저주'라는 현상이다. 이 용어는 20세기 북해에서 발견된 천연가스로 인해 오히려 장기 불황을 겪은 네덜란드의 실패 경험에서 유래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은은 정말 자원의 저주라 할 만했다. 반면 다른 유럽 국가에 은의 유입은 큰 축복이었다. 은은 몇 세기 동안 진행된 유럽의 화폐 부족을 일거에 해소했다. 은의 대량 공급이 유럽 국가에만 혜택을 준 것은 아니었다. 중국도 그랬다. 중국은 그 당시 일조편법(一條鞭法·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유지된 제도로, 현물세와 부역 등의 다양한 세를 납세자의 토지 면적과 식구 수로 단일 기준을 적용해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게 한 제도)의 시행으로 은이 법정화폐가 됐으나 은이 늘 부족했다. 에스파냐는 멕시코에서 은을 싣고 중국에 도착해 은을 도자기·비단 등의 사치품과 교환했고, 이 사치품을 유럽으로 되가져와서 팔았다. 이 덕분에 중국은 충분한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은이라는 보편적 통화로 세계가 연결되면서 16세기 이후 세계의 무역량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은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는 글로벌 교역망이 출현한 것이다. 인도양을 축으로 한 이슬람의 유라시아 교역권이, 신대륙까지 포함하는 서유럽 중심의 전 세계적 무역 네트워크로 서서히 확대되면서 세상의 중심축이 서유럽으로 바뀌고 있었다. 근세는 경제, 군사, 그리고 학문 모든 면에서 엄청난 역량이 서유럽에 모이고 축적되는 그런 시기였다. 18세기 중반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서유럽은 다시 한 단계 도약했다. 이제 서유럽을 이길 수는 있는 세력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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